320x100

 

큐레이터에서 사회복지, 그 중에서 장애인복지로 진로를 잡은 후에는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3학년때 날려먹은 학점을 다시 복구해야했고, 졸업기준인 영어성적을 맞춰야했고, 필수전공이자 사회복지사 자격증에 필수인 사회복지실습을 해야했다. 실습처를 직접 찾고, 신청서를 제출하고 면접까지 보는 지루하지마 긴장된 과정이었다. 대부분 사회복지관에서는 방학 기간에 맞춰서 실습을 진행하기 때문에, 이때 실습을 진행하지 못하면 졸업에 문제가 생긴다. 좋은 실습자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잡기 위해서 실습 공고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총 2곳의 실습면접을 거쳤고, 다행히도 서울 성북구에 있는 성북장애인복지관에서 실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습생을 나를 포함해서 2명뿐이었다. 직장인이 되어 여러 기수의 실습을 보았지만, 내가 실습받을 때 인원이 적긴 적었다. 

 

실습생은 대학생이지만 직장인의 체험도 하기 때문에, 방학 1달동안 강제 9 to 6를 하게 되었다. 출근해서 실습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오전 3시간 커리큘럼, 점심식사 후 오후 2~3개의 커리큘럼을 듣게 된다. 사회복지기관의 구조, 프로그램 기획 및 진행, 사회복지행정, 1박2일 캠프, 캠페인 등 대학교에서 이론으로 듣기만 했던 것들이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야’ 겨우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여러 커리큘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3가지는 프로그램 개발 및 진행, 1박 2일 캠프, 장애인식개선캠페인이었다.


- 프로그램 개발 및 진행

 

한타임정도 직접 대상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보는 커리큘럼이다. 나는 당시 큐레이터 준비할 때 아이디어 메모를 자주 했는데, 거기에 기록해놓은 아이디어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아이디어를 실제 실행가능한 계획서를 작성하고, 계획서 피드백과 수정을 거쳤다. 그렇게 피드백을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업은 장애아동의 소근육 발달과 창의성 발달을 위한 ‘시골집 앞마당 만들기‘였다.

 

싸이월드 형태의 3D 입면체 안에 본인이 상상하는 ’시골 앞마당‘에 어울리는 물품을 배치해보고, 이를 직접 보고 그림으로 까지 그려보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을 도와주던 봉사자 한분이 기존 학교 교육과정 중에 비슷한 과정이 있다고 했었다. 

 

내가 새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보니 당연히 교구는 없었고 내가 직접 다 만들어야했다. 우드락을 구매해서 아동 수별로 입면체를 만들고, 나무, 가축 등 다양한 이미지를 인쇄해서 하나하나 다 수작업으로 모형을 만들었다.

실습 준비물
실습 진행
아동 실습 결과물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간단한 질문을 통해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본격적으로 만들기에 돌입했다. 봉사자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어려웠다. 계획에 없던 변수들이 생겨서 실습동기와 허둥지둥 프로그램실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그 과정이 좀 아쉬웠다는 피드백을 받았었다. 

 

320x100

- 1박 2일 캠프

 

겨울방학에 실습이 이루어졌고, 당연히 방학을 활용하여 장애아동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1박 2일 캠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동, 봉사자, 실습생, 담당 사회복지사가 동행하는 꽤 많은 인원의 프로그램이었다. 겨울,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었다. 얼음썰매, 캠프파이어, 딸기 따기 체험, 요리 등 아동, 봉사자와 함께 즐겁게 놀았다. 실습 내 프로그램 진행 중에 내가 담당하는 아동이 1명 있었다., 캠프를 직접 가서 그 아동이 피아노를 좋아하는 알게 되었다. 피아노 건반을 치는 행동을 하면 아주 좋아했다.

프로그램 계획서

- 장애인식개선캠페인

 

성북장애인복지관은 이후에 내가 취업하는 장애복지법인에서 위탁운영하는 복지관이다. 자연스럽게 장애 관련 콘텐츠가 많았고, 역대 실습에서는 복지관 인근을 나가 자원개발 겸 장애인식개선캠페인을 진행했다. 당연히 우리도 해당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나가야 했지만 날씨의 영향으로 관내에서 이용자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캠페인 기획 아이디어
캠페인 기획 아이디어
캠페인 기획 아이디어
캠페인 기획 아이디어

처음에는 전지에 무언가를 쓰고 그리려 했는데, 둘 모두 영 손글씨에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캠페인 내용을 출력해서 화일에 끼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담당 복지사님도 1층에 요구르트를 세팅해주시면서 캠페인 참여를 도와주셨다. 복지사님이 1층 로비에서 관내 이용자님들에게 ‘요구르트 드시고 캠페인에 참여해주세요.’라고 하면 나와 동기가 차례대로 옆에 붙어서 캠페인을 진행했다. 관내 이용자분들은 캠페인에 대단히 호의적이셔서 마음 편안히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었다.

 

실습을 해야 했을때는 많이 귀찮고 꼭 해야하는건가라는 불만이 있었는데, 막상하고 나니 많은 것들이 내게 남았다. 특히 내가 직접 기획하고 / 준비하고 / 진행한 프로그램을 아동들이 신나하면서 만드는 것을 보고 정말 처음으로 느껴보는 쾌감, 짜릿함을 느꼈다. 내가 만든 사업은 내 자식과 같은 존재인데, 내 자식이 칭찬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아 참고로 원래 실습을 하면 기관에 실습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내야한다. 아마 거기에 급식비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내가 실습을 받았던 복지관은 실습장학생이라는 명목하에 오히려 장학금 10만원을 받고 실습을 받았다. 전공수업 실습발표 때 장학금을 받았던 곳은 내가 다녔던 기관고 모법인뿐이었다. 이후 그 법인에 취업했고, 거기서는 실습장학생들에게 100만원씩 지원해주었다. 확실히 장학금을 받고 실습을 받으니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실습을 준비하고 하고 있는 모든 예비 사회복지사분들 화이팅이다.

320x100
320x100
320x100

 

이 글은 필자 블로그에 업로드 된 글을 재업로드한 글입니다.(2021.01.11)

 

 

'인생의 길은 한 방향으로 난 기찻길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의 바퀴 자국이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소설에서 본 내용이다.

2017년 7월 24일~2020년 12월 31일, 1257일.

나는 퇴사했다.(무작정 퇴사가 아닌 이직 성공으로 인한 퇴사이니 혹시라도 걱정은 접어두길)

첫 직장, 첫 업무, 첫 모금의 흔적을 되돌아보려 한다.


1. 나는 무엇을 했는가

1) 회사 업무

3개월의 수습과 막내 기간, 1년간의 둘째 생활, 2019년부터 3인 1팀의 선임.

a) 거리 캠페인

가장 메인이 되는 업무로서 가장 추운 1,2월, 가장 더운 7,8월을 제외하고 매일 나갔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 지하철역, 병원이라면 달려갔다. 2,500번의 거절과 500명의 후원자를 개발했다. 낯가리고, 소심한 성격? 이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건 없다. 막내 때는 하루에 한 명 개발하기가 목표였다. 한 명이 개발되면 팀 실적의 3분의 1을 하기. 목표를 최소한 그리고 다양하게 잡으면서 멘털을 관리했다. 둘째 때는 캠페인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다. 디데일 달력, 개인 책자, 스티커판 등 내가 해보고 싶었던 캠페인을 진행해보았다. 선임이 되고서는 팀원들에게 내가 경험했던 캠페인의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덕분에 논리 정연하게 말을 하는 스킬이 늘었다.

거리 캠페인

2017년 9월 3일 첫 캠페인

b) 사찰 캠페인

첫 직장은 사회복지법인이지만 약간의 종교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찰에서도 캠페인을 진행했다. 하지만 나는 종교색을 가진 모금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리에서 비종교인을 대상으로 모금을 하면서, 종교색의 거부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9년이 돼서야 첫 사찰 캠페인에 참여했다. (당시 사찰 캠페인은 주말 법회에 기간에 주로 진행했기 때문에 지원자를 받았다.) 선임이 되고 기업 사회공헌에 관심이 생기면서 비슷한 사찰 캠페인 업무를 맡았다. 사찰 리스트업, 정보 리뉴얼, 섭외, 공문과 피드백 발송의 프로세스를 다시 정비했다. 2020년 코로나 때문에 모든 법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아쉽게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사찰에 보낸 감사편지

당시 사찰에 보낸 감사 편지

c) 콘텐츠 제작

캠페인은 말, 글, 시각정보가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말로만 전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글로만 읽히면 감정을 전달할 수 없고, 시각정보만 있으면 내용을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면 모금은 말을 잘하는 스킬뿐만 아니라 정보를 편집하는 스킬도 중요하다. 화려한 언변보다는 시각정보 제작에 강점을 가진 나는 콘텐츠 제작에 힘을 쏟았다. 책자, 피켓, 제안서, 굿즈 같은 형태에 따른 콘텐츠, 산하기관의 프로그램 별 안내책자 등 최대한 말을 덜 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했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 모든 콘텐츠 제작은 파워포인트로 만들었기에, ppt제작 스킬이 급 늘었다.

거리 캠페인 책자
거리캠페인 책자

생각보다 후원을 한 번도 안해본 시민분들이 많다

d) 프로그램 운영

모금 업무를 맡았지만 엄연히 나는 사회복지사다. (사회복지사 보수 교육도 받고, 연봉도 사회복지사 보수 체계를 따른다.) 당연히 대상자를 만나고 프로그램을 하는 기회도 있었다. 1년에 한 번뿐이었지만. 산하기관 대상자들과 함께 1박 2일로 여름캠프를 떠난다. 그리고 법인 직원들이 숙소 예약, 오락프로그램, 식사 등 캠프 전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입사하고 3일 뒤에 바로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는 뭔지도 모르고 참여했다. 이거하라해서 이거 하고, 저거 하라 해서 저거 했다. 선임이 되고 나서는 간식 프로그램 업무를 담당했다. 간식 메뉴 선정, 주문, 재고관리, 푸드트럭 섭외까지. 여러 외식 업체와 컨택을 했었으나 여름 식중독 위험으로 전부 거절당하기도 했고, 간식을 만드는데 전기가 나가서 도구를 다 옮겨서 만들기도 했다. 사업계획에 이론만큼 실전의 경험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사회공헌 제안 리스트

2019년도 당시 폭염으로 인한 식중독 위험으로 푸드트럭 형식의 사회공헌 제안이 많이 거절되었다

e) 기업 사회공헌 시도

온라인 모금을 제외하면 모든 모금은 대면 모금이다. 거리 캠페인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시민의 얼굴을 보고, 기업 사회공헌은 담당자의 얼굴을 보고 한다. 선임이 되기 전부터 기업 사회공헌에 관심이 생겼다. 게임회사의 기업사회공헌팀과의 미팅을 할 기회를 얻었다. 사회공헌팀이 뉴스레터를 통해 연말에 구독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우리 법인의 사업을 설명해서 발송했다. 회사 내 사람이 아닌 외부 사람이 답변을 보낸 것이 신기했는지 먼저 연락이 왔었다. 그리고 미팅에 가서 하지 말란 짓을 다 했다. 지금도 후회한다. 아쉽게 그 이후 진척이 되지는 않았다. 그 후 다른 게임회사에도 제안서를 만들어서 보내보기도 했다. 당연히 잘 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내가 가진 모금의 경험이 많이 편중되었다고 판단, 더 다양한 모금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f) 데이터베이스화 작업

내 MBTI는 INTJ다. 분석적이고 숫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회사라면 데이터가 당연히 정리되어야 한다는 직업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겪은 거리 캠페인은 구전, 체감의 느낌이 강했다. 성과가 숫자(후원금)로 측정됨에도 통계를 내거나 분석할만한 툴이 마땅히 없었다. '현장의 피로도가 늘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합리적인 데이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입사 후부터 퇴사 직전까지 캠페인을 기록했다. (중간에 6개월 정도는 빈다.) 성별, 연령, 금액, 장소, 날씨 등을 기록하고 통계를 냈다. 시민을 멈추게 해서 설명을 듣고 개발까지 하는 확률, 연령과 성별에 따른 평균 금액 등의 통계를 냈다. 예를 들어 후원개발 확률은 평균 30%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으며, 30대가 가장 적다. 전연령을 다 합쳐 후원 평균금액은 13,000원대이며, 40대 이상의 평균금액이 가장 높다. 이런 식으로 데이터와 통계를 활용하니 관리자나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데이터베이스를 위한 엑셀작업
캠페인 하면서 메모한 메모지

엑셀로 정리한 통계자료들 / 3년간 기록했던 메모지

g) 잠재 후원가족 개발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나온 프로젝트가 '잠재 후원자 개발'프로젝트다. 후원개발률은 30%대로 큰 변화가 없으나, 전체적인 실적은 감소했다. 즉 캠페인 참여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통계로 확인했다. 팀원들의 설명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는 분석을 근거로 회사에 제안했다. 현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재접 촉할 수 있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볼 때 좀 더 익숙해진다면 캠페인 참여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물론 회의를 통해 첫 계획과는 노선이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방향(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접촉하기)을 위해 서명을 받고 웰컴 웹진을 보내기로 가닥을 잡았다. 약 140여 명의 서명을 받았고, 1분이 정기후원에 참여했다. 더 많이 받았다면, 지금 같은 코로나 때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온라인 모니터링단 가입서
서명양식

왼쪽 : 초기 아이디어 / 오른쪽 : 회의를 통해 변경된 서명양식

h) 신입직원 교육

선임이 되면 1개 팀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신입직원 교육에 직접 참여한다. 모금 명분 서교육과 어프로치 교육 2개를 맡았다. 내가 만든 교육이 아니라 인수인계받은 교육이기에 먼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는 현재에 맞게 조금씩 수정했다. 단순한 경험이나 사례 전달에 그치지 않고, 왜 그 방식을 사용했는지 이론적 배경이나 근거도 추가하고 싶었다. 당시 듣고 있던 캠페인 매니저 자격증 교육과 직원 복지였던 도서구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금 명분 서교육은 짧긴 했지만 직접 작성해보는 교육도 있어서 약간의 변형을 주기도 했다. 어프로치 교육도 이전 자료가 너무 단순해서 지금 하는 캠페인에 맞게 더 많은 자료들과 실습을 추가해봤다.

신입직원 교육자료

[무기가 되는 스토리-도널드 밀러 저]를 읽고 교육자료로 만든 것 중 일부


2) 사이드 프로젝트

입사 후 1년이 되면 1주년 기념이라고 축하를 받았다. 꽃다발과 표창을 받고 자리에 가서 생각해봤다. 그 1년 동안 영어공부를 했으면 영어를 마스터했고, 글을 썼으면 책 하나를 탈고했을 텐데. 남은 게 뭐지? 그래서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했다.

a) 브런치 글

처음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단편소설을 쓰다가 잠정 중단했다. 다음에 도전했던 것이 업무 관련 글쓰기였다. 업무를 하면서 느낀 감정(특히 분노)을 해소하는데 글쓰기만 한 게 없었다. 부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메모장에만 써놨던 글들을 브런치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 써놓은 10개의 글 정도만 올려보는 수준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패드로 글을 쓰고, 자료를 찾았다. 그러던 중 한 모금 관련 뉴스레터에 내 글이 올라가고 조회수가 급증한 것을 계기로 브런치 글에 더 진지하게 접근했다. 연재 형식으로 가급적 2주에 한 개씩 올려보려 했고, 단순 논리에서 최대한 많은 근거 사례들을 수집하려 했다. 브런치는 내가 모금가로서 직업관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https://brunch.co.kr/@ohsummer/2

b) 펀딩

펀딩에 참여만 해봤지 실제 펀딩을 열어보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그래서 나노 블록으로 리워드로 줄 수 있는 굿즈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펀딩을 열고 운영해볼 수는 없었다. 캠페인 업무를 하기도 바빴으니까. 그러던 중 브런치 글을 보고 먼저 연락해온 분과 연이 닿아 펀딩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퇴근 후 7시부터 3시간 정도 강남에서 교육을 받았고, 실제 펀딩 오픈까지 이어졌다. 펀딩을 오픈할 때 대부분 놓치는 요소, 어디에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 모금을 위한 좋은 글을 쓰는 것만큼 채널 확보와 채널에 어울리는 콘텐츠 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https://brunch.co.kr/@ohsummer/33

c) 전자책

브런치의 글은 유튜브나 블로그와 다르게 직접적인 수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팔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감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다.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고, 구매자들을 자극할 만한 내용. 당시 신입들과 거리의 학생들이 많이 물어봤던 질문이 캠페인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토대로 전자책을 집필했다. 책의 내용을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테고리만 정하면 쓸 내용이 저절로 나왔다. 오히려 편집이 어려웠다. 전문 프로그램이 아닌 익숙한 한글 프로그램으로 초안을 만드니, 실제 출판하는 책과는 느낌이 달랐다. ebook 프로그램으로 편집하려다가 코딩을 해야 해서 포기했다. PDF 파일로 단순하게 만드는 걸로 방향을 틀었다. 만들어만 놓으면 당연히 팔릴리 없다는 걸 펀딩을 공부하면서 배웠다. 브런치 글을 쓸 때마다 판매 링크를 추가했다. 첫 판매의 흥분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부담감을 느꼈다. 아메리카노 두 잔 정도의 가격이지만 분명 나의 지식을 구매하셨다. 지식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올해 총 4편을 팔았다. 수수료를 제하고 내 수중에 들어온 판매금은 32,000원. 순전히 나만의 지식을 가지고 번 수익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전자책을 쓰려고 한다. 새로운 내용. 새로운 플랫폼을 경험해보고 싶다.


p.s 왜 그동안 글을 안 썼나

퇴사 후 1주일간 나름대로 방탕하게 살려고 했다. 여행 대신(이 시국 때문에) 늦잠도 자고, 안 하던 게임도 하고, 배달음식도 시켜먹고. 그러나 이런 생활도 딱 1주일까지만. 1월 4일부터는 다시 일을 하던 패턴대로 생활하고 있다. 관련 직종으로 이직에 성공했지만, 발령일이 미정이라 감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 관련 책도 읽고, 브런치 글과 책도 쓰고, 가벼운 운동도 계속할 예정이다. 이렇게 글을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을 즐겨보자.

320x100
320x100

나는 운이 좋게 첫 직장이 사회복지법인이었다. 크기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실습생, 신입직원이 오면 선임으로서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사회복지분야에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직업적 괴리감, 사회복지사가 아닌 직장인으로서의 직업관의 혼란 등을 겪고 있었다.

 

고작 7년 남짓의 경력으로 필자가 무슨 슈퍼바이저처럼 피드백을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먼저 겪은 선배로서 안 좋은 경험은 피해 가고, 나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경험만을 최대한 많이 누리기를 바라면서 매 월 1회, 업로드 하고자 한다.

 

(나 또한 많은 경험을 누리지 않았기에 현 독자들이 읽는 시대와 맞지 않거나, 법과 정책의 변화기 있을 수 있다. 2023년도를 기준으로 작성된 글이며, 오류가 있을시 댓글로 피드백 주면 감사하겠다.)

 

아동과 놀이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햄스터 사회복지사
아동과 놀이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햄스터 사회복지사

 


 

1. 직업 vs 직장

당신은 왜 사회복지영역에 뛰어들었는가? 그렇다면 왜 사회복지사를 선택했는가? 왜 여기여야 하는가?

 

면접 질문 같은가? 맞다. 사회복지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사회복지사가 아니고, 사회복지사업을 할 수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다면 어딘가에 속해 있어야 한다. 사회복지법인일수도 있고, 사회복지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과정의 고민보다 어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하다. mmorpg 게임은 만렙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끝이 아니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부터 본게임이라는 말이 맞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먼저 했으면 하는 마음에, '직업 vs직장' 파트를 가장 먼저 넣어보았다.

 

(표를 보고 답변을 잠시 생각해 보자. 1분 안에 나만의 답이 떠오른다면 넘어가도 좋다.)

1) 나는 왜 사회복지를 하고 싶은가?
 
2) 왜 사회복지사를 선택했는가?
 
3) 왜 이곳이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답변이다.)

1) 나는 왜 사회복지를 하고 싶은가?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2) 왜 사회복지사를 선택했는가?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를 하기에 자유도가 가장 높기 때문에
3) 왜 이곳이어야 하는가?
아동복지가 된다면 자연스레 다른 장애인복지, 노인복지도 해결 될 수 있어서

 

1) 나는 왜 사회복지를 하고 싶은가?

사회복지사는 엄연히 전문 자격증을 가진 전문직업이다. 자격 취득 난도와 상관없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 직업인이다. 더구나 전문직업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한다는 봉사적 인식과, 금전적으로 큰 연봉을 기대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복지를 하고 싶어 하는가? 이게 정립되지 않고 사회복지에 뛰어든다면 큰 회의감을 가진 채로 그만 둘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다. 이 말을 들으면 바로 물음표가 튀어나온다. 추가 설명을 하자면 대학교 때 사회복지학과와 국사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그리고 큐레이터를 준비했었다. 당연히 전시회를 자주 다녔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과 전시회가 많이 부족함을 체감했다. 

 

만약 장애인들도 박물관, 미술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시장의 규모가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장애인구가 문화 관련시장으로 들어온다.->장애인구가 문화 관련시장의 생산자, 소비자로 참여한다.->문화 관련시장의 생산과 소비가 활발해진다->문화 관련전체 시장이 커진다

 

그래서 장애인복지에도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유는 굳이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사소할 정도로 개인적이어도 된다. 다만 그 명분, 구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실습생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좋아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는 답변이 꽤 있었다. 내가 느낀 좋은 경험을 더 많은 시민들이 누릴 수 있게 하는 명분도 좋다. '왜?'라는 질문의 답을 먼저 찾게 된다면, 그다음 스텝은 저절로 찾을 수 있으니까

 

 

2) 왜 사회복지사를 선택했는가?

뒤에도 후술 하겠지만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만 사회복지를 하지 않는다. 사회복지공무원, 시민단체활동가, 봉사자, 기업사회공헌팀, 후원자, 행정가 등등 다양한 업종과 직군이 사회복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는가?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사를 선택했다고 해서 은퇴할 때까지 사회복지사만 하는 시대는 아니다.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일을,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사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를 하기에 가장 쉽다는 일종의 편견 때문일 것이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합격률은 평균 30~40%다.(2023년 자격증 합격률 40.1%) 그마저도 4년제 졸업생들은 대부분 합격할 정도로 어렵지 않다. 사회복지관도 지역별로 다 있어서 수시채용이 많다. 반면 사회복지공무원은 말 그대로 공무원이다. 고시기간은 적어도 1년은 잡아야 한다. 기업사회공헌팀은 대부분 대기업에 있고 공채는 거의 드물다. 

 

사회복지실천론 교육을 들으면 사회복지사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중재자, 중개자, 옹호자 등 다양한 역할이 나온다. 즉 사회복지사는 적재적소에서 여러 업무를 맡는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회복지사가 하던 역할을 기업이 하기도 하고, 사회적 기업이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면 사회복지사는 사라지는가? 아니다. 여전히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를 하는 전문직업이다. 사회복지사만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골목골목마다 사례관리를 대기업의 사회공헌팀이 할 수 있을까? 다른 지역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지역 내 문제를 사회복지공무원이 해결할 수 있을까? 사회적 기업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와 치료비 지원 사업을 연결해 줄 수 있을까? 

 

아무 의식 없이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사회복지관에 취업해서, 사회복지업무를 한다면, 사명감을 가지고 더 잘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의 자리와 혜택을 받을 클라이언트의 권리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냉정한 이타주의자]라는 책을 보면 남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척도로 계산한다. 만약 내가 사업에 재능이 있다면 차라리 사업체의 사장이 되어서 큰 손을 가진 후원자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유튜브로 성공 수 있다면, 내 유튜브의 영향력을 활용해서 캠페인을 홍보할 수도 있다. 

 

나는 어디에 재능이 있는가. 사회복지사가 내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이라면 기꺼이 도전하라.

 

3) 왜 여기여야 하는가

사회복지는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와 싸우고 있다. 개인과 사회가 싸우면 대부분 개인이 패배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편을 만드는데, 그 편이 바로 사회복지를 주요 업으로 하는 단체다. 

 

우선 병원에 의사가 있듯이, 사회복지관에는 사회복지사가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면 자연스레 사회복지관 취업을 원한다. 이를 전공서적에서는 1차 현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복지관도 거대한 사회에서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사회복지관을 지원해 주는 단체를 2차 현장이라고 한다. 사회복지법인이나 협의체, 지자체 등이다. 그리고 제3섹터라고 불리는 비영리영역의 단체들이 존재한다. NPO단체, 그 단체를 지원하는 협의체, 관련 컨설팅기관과 금융기관, 사회적 기업 등이다. 

 

'여기' 즉 직장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아군이 나와 같이 싸울 수 있는 정예병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급도 밀리고, 간부와 병사가 싸우기만 하는 군대라면 당연히 필패한다. 역으로 보급도 빵빵하고 간부와 병사가 한 몸처럼 협력하고, 전략과 전술이 적절하다면 승리할 수 있다. 

 

1차 현장에서 사회복지사의 보수는 보수체계가 매년 정해져 나오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사회복지관을 위탁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의 풍족함에 따라서, 복리후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집이 가까운가, 2) 관심 있는 클라이언트(아동, 노인, 장애인 등)를 담당하는가가 우선순위가 될 확률이 높다. 사내문화 직장 내 복지는 실제 면접을 가거나 취업사이트, 선배 취업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한다. 만약 2차 현장이라면 연봉협상이 중요해질 것이다.

 

보수, 복지, 연봉이 50%라면 나머지 50%는 이곳을 통해 내가 관심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이다. 단순히 이 직장의 네임밸류가 필요한 것이라면 절반은 포기하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4) 직업 vs직장

직업과 직장을 대립되게 표현되게 했지만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다만 비중을 어디에 더 많이 둘 것이냐의 차이다. 과거에는 직장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시대라면, 지금은 직업에 더 많은 비중을 둘 때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어디 어디 사회복지관의, NPO단체의 직원이 아닌, 사회복지사 누구누구라고 불리는 전문가가 되길 바라본다.

 

 

 

2024.04.17 - [사회복지에서 살아남기(Survivng the Social Sector)] -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사회복지와 국사학의 융합의 길을 찾다.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사회복지와 국사학의 융합의 길을 찾

2024.04.10 - [사회복지에서 살아남기(Survivng the Social Sector)] -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사학과를 복수전공하다.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사학과를 복수전공하다. 2024.

npo-archiving.tistory.com

 

320x100
320x100

사회복지계열에서 일한 지 거진 7년이 되어간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대학교 시절까지 합치면 11년이 넘는 시간을 이 분야에 바쳤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왜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내 개인의 역사를 한번 되짚어보기로 했다. 이 글을 통해 그동안의 여정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글감을 찾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많은 사회복지 관련 경력과 경험을 쌓아온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많이 겪었지만, 아직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한 마디 때문이다.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 문구를 떠올린다. 외부의 평가와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내가 세운 명분과 원칙에 따라 일하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자고 마음먹는다.


 


2009년 수능을 마치고 어느 학과를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원래 내가 가고 싶었던 전공은 역사와 관련된 전공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역사 과목을 좋아했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모의고사 탐구시험시간에 학교에서 선택하라고 한 4과목(윤리와 사상, 국사, 한국지리, 사회문화)을 다 풀고 항상 시간이 남아서 세계사까지 따로 시험지를 빼서 풀곤 했다.  

 

역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와 관련된 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꿈꿔왔다. 역사 과목에 대한 나의 열정은 단순히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역사를 통해 우리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깊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나에게 대학 진학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것을 넘어, 나의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오직 하나의 대학교만을 목표로 삼았다. 바로 서울시립대였다. 서울시립대를 목표로 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싼 등록금 때문이었다. 지방 출신인 나에게 대학교는 서울에서 나와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싼 등록금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서울대는 입학 컷이 너무 높아서 현실적으로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교대 및 교원대는 당시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선택지에서 탈락했다.

 

당시 대학 순위에 대한 인식은 '스카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성한(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경외시(중앙대, 경희대, 한국외대, 서울시립대)'와 같은 구분이 있었다. 이 중에서 사립대를 제외하고 고려할 수 있는 곳은 서울시립대뿐이었다. 서울시립대는 서울특별시가 운영하는 공립대학으로, 사립대학에 비해 학비가 상당히 저렴한 것으로 유명했다. 2010년도 입학 당시 문과 기준으로 200만 원 대였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독서평설의 대학 소개 페이지에서 서울시립대가 등록금이 싸다는 것을 보고 오직 여기만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로 서울시립대를 목표로 삼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역사와 관련된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고민이 필요했다. 국사학과의 경우 경쟁률이 상당히 높아(14:1 경쟁률), 내가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사회복지학과(7:1 경쟁률)에 먼저 입학한 후, 나중에 전과를 통해 원하는 학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나는 꿈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서울시립대에 최종 합격했을 때의 그 기쁨 지금도 잊을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는 ,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던 , 컴퓨터로 최종 합격자 조회를 했을 '합격'이란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의 환희는 말로 표현할 없는 감정이었다. 바로 의자를 박차고 "합격!"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가게 입구에 계시던 부모님에게로 뛰어갔다. 순간, 나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선택이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to be contiuned...

 

2024.04.10 - [사회복지에서 살아남기(Survivng the Social Sector)] -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사학과를 복수전공하다.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국사학과를 복수전공하다.

2024.04.03 - [사회복지에서 살아남기(Survivng the Social Sector)] -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하다. [Chapter 1. 사회복지학과에서 살아남기]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하다. 사

npo-archiving.tistory.com

 

https://litt.ly/locomango

 

F2F캠페인부터 기업사회공헌까지

작은 비영리단체에서 대형 비영리단체까지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litt.ly

 

320x100

+ Recent posts